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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액땜에 대한 상상미학(8)
    창작 2010. 2. 8. 14:01
     
     



     

    액땜 [厄땜]:앞으로 닥쳐올 액을 다른 가벼운 곤란으로 미리 겪음으로써 무사히 넘김.

     

    솔직히 앞으로 행운이 다가올지 불운의 연속일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미래를 대비해서 가벼운 곤란으로 미리 겪고 무사히 넘겼다는 것은 상당히 어폐가 있다.

    "액땜"이라는 곤란을 겪지 않았어도 좋은 일이 찾아올 수 있고 "액땜"을 겪었어도 계속해서 안좋은 일만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럴 때에 "액땜"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깐 때마침 좋은 일이 생겼고 그 이전에 안좋은 일이 있었다면 결과론적으로 "아 좋은 일이 있을려고 그런 곤란을 겪어서 액땜을 했구나"이렇게 표현할 수 있고 곤란지경에 대해서 그 상황에 아쉬웠거나 정서적인 위로성 차원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덜어보고 벗어나기 위해서 긍정적인 효과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혹자는 싹쓸이를 액땜이라고도 하고 "논쟁에서 이기는 79가지의 방법"중 53번째에 "이전의 실패는 액땜이라고 말하라. 도박꾼의 오류 The gambler's fallacy"이라고 했다.

    액땜을 검색했더니 핀란드 출신의 상징주의 화가 '후보 짐베르크'의 [부상당한 천사]라는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은 "눈을 가린 천사와 힘없이 움추려진 천사의 날개는 약자의 체념을,힘이 잔뜩 들어간 소년들의 손아귀는 무능력한 약자의 분노를 나타낼 뿐이고 상처받고 상처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자의 슬픔 같은 것을 느낀다."

     

    위와 같이 액땜은 
    1.싹쓸이 
    2.실패 
    3.체념,상처,무기력
    4.세상에 이런 일이...ㅠㅠ
    를 의미하고

     

    액 [厄]:모질고 사나운 운수.

    한마디로 삶에 있어서 위기 상황이고 벗어나기 힘든 재앙일뿐인데 그런 불우한 상황을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으므로 "땜"하나 붙여서 위기관리(危機管理),위기모면하므로서 슬기롭게 대처하고 보다 긍정적인 효과를 얻어내고자 함이다.
    여기서 위기관리,모면하고자 하는 정서적 심리적 상태일 뿐이지 실질적으로 관리또는 모면의 어떤 의지적 행위는 표출되지 않는다.


    #.액하고 액땜은 의미는 다르지만 사실상 일어나는 현상에 있어서 액하고 액땜하고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싹쓸이당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 있었고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곤란을 극복하기 위한 "행위"는 이미 곤란한 상황이 아니므로 액땜이 아니란 것이다.
    즉 의지적인 행위가 따르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액도 아니고 액땜도 아닌 것이다.
    곤란한 그 상황 자체가 그냥 "액땜"인 것이다.

    "액"과 "액땜"의 의미가 반전을 말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반전이 일어나지 않은 같은 상황을 일컬으니 액과 액땜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액을 액땜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치에 안맞으니 참으로 모순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상황에 맞지 않은 모순일 뿐인 단어를 사용해서 액을 액땜으로 표현했을까?
    의문스럽다.
    과연 누가 현재의 "액"적인 상황을 예언가도 아닌데 미래에 더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해서,더 나쁜 상황을 막기 위해서 "액땜"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고 그 결과가 현재의 "액"적인 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스러운 단어가 액땜일 것이다.

     

    액땜하는 방법이 있다 한다.
    손없는 날,집터가 산근처에 있으면 좋고 등산이나 사찰을 찾는 것, 108배,부케를 잘 말려두었다가 태운다던지, 미신적인 행위나 근신,부적등이 있다.


    "액땜하는 방법"도 미래를 대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역시 미래는 예측불과이므로 그 액땜의 방법이 효과가 있었다고 증명할 수는 없는 일이고 결과가 좋았다면 단지 액땜의 효과로 돌릴 뿐이고 결과가 의외로 좋지 않았다면 액땜의 효과가 없었나 내지는 액땜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액땜을 한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어떤 곤란한 상황에 대해서 "액"이라고 하지만 "액땜"이라고 하거나 더 적극적인 "액땜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갖다붙이는 말이고 행위에 불과하며 액땜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액땜의 방법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전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언대 그래서 "액땜"은 신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용할 수 없는 모순적인 단어 "액땜"은 의미가 있고 시사하는 바가 있으므로 우리는 더러 "액땜"이라고 표현하고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삶은 고난과 시련이 거듭되어 왔고 거듭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오직 "액"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감당하기 힘드니 역으로 (모순적이고 신용할 수없는 단어) 액땜했다고 표현해서 행(幸)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심리적 측면에서 승화시킨 것이다.

    그러니깐 "액땜"은 "액"의 변명인 것이다.


    재밌는 것이

    변명(辨明)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1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함. 2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힘.

    대체로 우리가 사용하는 "변명"은 1일진대 2의 의미도 있으니 구태의연하게 변명을 1로 해석하지말고 2로 확대해석한다면 "액땜"은 "액"의 사리를 밝힌 것이고 


    사리(事理)

    1 사물의 이치.2 변화하는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불변하는 진리.


    다시 정리하자면 

    "액땜"은 "액"의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불변하는 진리"를 밝힌다라고 해석해보자.

    결과적으로 "액땜"은 "액"의 곤란한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불변하는 진리이고 "불변하는 진리"는 (앞으로 닥쳐올 액을 다른 가벼운 곤란으로 미리 겪음으로써 무사히 넘김)을 말함이다.

    쉽게
    "액"은 "액땜"맞다

     

    #.행복하고 좀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 "액"을 "액땜"했다고 심리적 측면에서 표현한 것은 심리적 측면 배후에 불변하는 진리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액"을 "액"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미 "액땜"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행복한 미래를 보장한다는 것은 불변하는 진리인 것이다.

    액땜은 모순적이지도 않은 표현이고 신용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곤란지경을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액땜이라고 할 수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행복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드라마틱하게 액땜을 불러들여서 "액땜하는 방법"을 하거나 곤란지경의 유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이지만 삶의 경험치로 고난이 거듭되듯이 반드시 행복지경도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기원하는 의미에서 액땜을 자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아마도 미신적인 행위들 "액땜의 방법"은 고래부터 토속적인 문화로 자리잡아왔고 현재까지 이뤄지고 앞으로도 보다 개발되어서 행위예술 또는 performance art로 불릴만하다.

     

    ex)보쌈
    약탈혼의 일종.
    여자집에서 외간남자를 보(褓)에 싸서 잡아다가 강제로 동침시키는 경우와, 남자가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오는 과부업어가기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남편을 둘 이상 섬겨야 할 팔자인 딸을 위해 양반집에서 외간남자를 납치해다가 처녀와 동침시킨 후 함구령을 내린 채 풀어주거나 죽이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과부가 될 액운을 면해 안심하고 시집을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한편 과부업어가기는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경우와 강제로 보쌈하는 경우가 있다. 강제일 때는 가족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대개 법적 문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어떠한 형식으로든 마을 내 노총각·노처녀를 없애고자 하는 관(官)의 입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쌈은 불경이부(不更二夫)라는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여자의 수절을 강요당하며 살았던 봉건적 질서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함경도 지방에서는 소박맞은 여인이 이른 새벽 서낭당에서 보쌈해 가기를 기다리면, 이 소박녀를 보는 최초의 남자가 보쌈하여 집으로 데려가 살아야 한다는 관습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대단히 기막힌 내용인데 그 의식이 불법이냐 합법적이냐의 논쟁은 차치하고 행복해지고 싶은 일념하에 어떤 희생을 각오하거나 씌워서라도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치명적인 행위예술일 것이다.

     

    내가 당하는 현재의 고통도 과거의 고난도 앞으로 다가올 시련도 행복을 전제로 한 것이며 나로 더불어 실패와 시련을 함께 하는 당신과 우리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서 기꺼이 액을 액땜으로 변명하고자 이 글을 썼다.
    그렇다 
    나는 지금 변명하는 것이다.

     


    '당신을 위해서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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