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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시나무새,모성애의 가치까지 왜곡시킨 모호한 드라마.
    tv/스타 2011. 5. 8. 13:24




    가시나무새는 모성애의 가치까지 왜곡시켜 모호한 드라마로 종결하다
    .



    김민정이 한유경을 연기했기에 마무리를 대폭 수정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호연이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연민 작용,이해되어지기 보다 이해를 강요하고 왜? 전체 흐름에 맥을 끊어버린 것인지 의아할 뿐이며 작가의 메세지는 혼란스럽고 난해하다.


    초반부터 심리적 갈등을 느끼거나 스트레스받으면 어김없이 헛구역질했기에 면역결핍증이라는 병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윤명자가 유방암 걸려서 재활했듯이 유경이마저 재활한다면 잦은 기적이 비현실적이며 막판에 양모의 등장도 유경이의 구원투수로 짜집기한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영화사를 차지하려고 몸부림치던 유경을 폭탄이라고 했듯이 냉정하고 계산적인 유경이의 치부를 다 같이 공격하다가 치부에 대한 인식을 대뜸 환부에 촛점을 맞춰 파렴치한 행위에 당위성을 막무가내 부여하니 아무리 드라마라 하더라도 작가의 시각이 불공정한 사회와 너무 닮아 있어 소름끼친다.


    영조가 정은에게 올인하는 이유는 정은의 마음이 한결같고 조건없는 사랑에 기인한 바,빈털털이가 되거나 사업이 위기에 처할 때 용기와 위안을 주었으며 버려진 윤명자와 한별에게도 자기희생을 다 했기에 가치있고 행복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유경은 윤명자나 한별,영조가 가장 비참하거나 구차해졌을 때 목적과 이기심을 위해서 버릴 생각만 하다가 그들이 탐스러운 꽃으로 다가오거나 자신의 결핍이 심화될 때 혈연이라는 기득권을 주장하니 참 뻔뻔하고 구차하다.
    자신의 원죄로 돌리는 윤명자 외에 모든 사람이 유경을 외면하자 비로소 마음을 비우는 자세는 파행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단지 후회,패자로서 굴종의 술수로 여겨질 뿐 진정성이 없다.
    게다가 시한부가 되니 속죄로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속죄한 듯 짜맞출 뿐이다
    면역결핍증이라는 병명처럼 과욕으로 제살 깎아먹기였다지만 결과일 뿐,단 한번도 희생을 한 적이 없고 거추장스럽거나 불편해진 타자들을 칼로 푹푹 쑤셔대다 오욕이 쌓여 자기가 쳐놓은 함정에 빠진 것뿐이다.


    바보같은 정은이가 견디다 못해 도망치고 모든 것이 유경이 차지가 되었다면 모진 행위에 대해 반성따위 없으며 필요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영혼조차 팔아버려도 된다는 잘못된 가치관이 고착되었을 게다.
    걸리지 않으면 죄가 아니고 걸렸으니 죄인이 될 밖에.
    벌받지 않으면 반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 대다수라서 벌을 받아야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고 그 위선과 가식에 착각해서 용서하니 세상이 원래 가식적인 게다.
    드라마가 권선징악을 대변해주지 않은지 오래지만 지독한 악행을 저지른 위인(爲人)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쉽게 용서하고 포용한다면 세상을 닮아버린 꼴이다.
    한유경의 가식은 심하게 비겁하며 매력적이고 자존심 강한 연기자 김민정을 빈티모드로 전락시킨 점이 아쉽다.


    입양한 자식을 두고 친모와 양모가 잔인하게 흥정하던 것을 목격하면서 유경의 트라우마는 모든 비극의 단초를 마련하더니 정은의 헌신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핏줄을 강조해서 자식을 버린 엄마를 미화시켰고 막판에 뒤집기 한 판,인륜을 강조하기 위해서 배경과 전제가 무색할 정도로 양모가 갑툭튀해서 '유경이살리기 프로젝트'로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영조 엄마는"버려진 자식이 더 아플까? 버린 엄마가 더 아플까? 질문하며 영조는 "엄마는 당연히 버린 엄마가 더 아프다고 하시겠지만 버린 엄마와 자식을 놓친 엄마가 비교가 되나요?" 하자 "버린 엄마가 더 아프지" 하면서 한결같이 떼거지로 유경을 변호하느라 정신줄 놓아 버린다.


    피치못할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버려진 자식보다 버린 부모가 더 아플 것에 공감할 수 있다는 논리라?

    어불성설이다.
    피치못할 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모성애가 위대한 것이지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미의 자격을 논한다면 윤명자 말대로 개만도 못하다는 표현은 어디로 도망가고 갑자기 왜 이런 개수작이 나왔는지 뜬금없고 정말 작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유경의 트라우마는 트라우마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영조 엄마의 경우는 부유한 할아버지에게 보내니 자식의 장래를 생각해서 그리운 모정을 끊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 희생이 따랐다.
    하지만 윤명자도 자식의 아버지가 감옥에 갔다 하며 자식을 놓쳤다가 2년 후에 찾아가니 아기가 너무 비실대서 입양시키고 양모가 더는 못키우겠다고 할 때 그저 돈으로 떼웠던 것이고 유경은 영조를 원수로 여기기 때문에 뱃속에 있는 아기를 거부하면서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거는 것조차 싫을 정도로 아기 자체를 부정했다.
    영조 엄마는 재혼한 남편을 사랑하고 낳은 자식이며 윤명자나 유경은 아이의 씨를 뿌린 남자들을 혐오하는 장면이 있기에 원치않는 자식이었으며 인생에 걸림돌이라 버린 것이니 뒤늦게 모정 운운할 수는 있어도 버린 엄마가 더 아프다는 것은 모성애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죄책감때문에 아픈 것이다.
    즉, 자식이 보고 싶고 걱정되어서 아프기보다는 언젠가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자기애로 인해서 아픈 것인데 어째서 모성애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을 책임지지 못한 이상한 엄마들을 호들갑스럽게 변호하는 것인지 작가의 사고체계가 악성바이러스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자식을 버리는 엄마는 자신은 살겠다는 의지며 자식을 버리겠다는 것은 내심 자식의 존재를 부정, 뱃속에 있었던 상태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며 모성애를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은 절대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 어미의 마음, 자신을 희생하기 때문에 모성애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경이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 친모와 돈의 압박때문에 양모마저 자신을 두 번 죽이므로 절대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가  똑같은 원죄를 한별에게 저지르는 것이며 여기까지는 인과관계가 설명된다.
    하지만 윤명자나 유경이의 행위에 모성애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정당성까지 부여한다면 트라우마의 성립이 무너진다.



    왜 이런 난해한 마무리로 설정 자체를 뿌리채 흔들고 유경이처럼 제살깎이했을까?



    예기치못한 결론에 집착해서 반전효과를 준답시고 꽈배기 반대로 비틀어서 망가진 땡도너츠처럼 포기할줄 모르는 작
    가의 과도하고 왜곡된 욕망의 반영이다.

    '가시나무새' 제목만큼이나 비장미(悲壯美)가 철철 흐르다가 용두사미격으로 행복찾기 홈드라마처럼 시시해지고 팜므파탈 유경이가 떼장이로 변한 것처럼 작가와 유경이 일체다.
    콩쥐 컴플렉스에 걸려 바보처럼 착하고 오지랖질의 정은이도 부족해서 유경이마저 개성과 핏발을 잃어버려 팥쥐도 아닌 것이 콩쥐도 아니며 엉터리 엄마들의 궤변으로 모성애를 부정한 생물학적 엄마를 미화시킨 것을 보면 작가야말로 콩쥐컴플렉스에 걸린 것은 아닌지?


    윤명자,영조엄마,정은엄마,한별버린 유경이,영조 계모의 외가때문에 거의 망할 지경의 영조형을 보더라도 가시나무새에서 제 정상적인 엄마는 학구엄마나 정은(이상한 것은 마찬가지만 뭐 그렇다치고 )이밖에 없을 정도로 부도덕하고 모성애 결핍증을 대거 등장시킨 것이나 배반 종결자! 유경의 캐릭터를 설정하는 필력을 보면 작가의 알 수 없는 결핍과 욕망에 대한 집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듯 싶다.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것은 처절한 고통을 치뤄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설의 새 가시나무새는 바로 우리 모두의 삶이다"

    콜린 맥컬로우의 글귀는 작가가 자신에게 던진 말이며 던져야할 말이 아닌가싶다.
    버려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양자택일의 상황에서도 전부다 취해버리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작가의 왜곡된 욕망과 집요함,의미있는 시놉시스와 반대로 종지부를 찍어 의미가 상실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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